닫기

[손병두 前 전경련 부회장에게 듣는다] “정부 강행 빅딜은 실패, 자율 구조조정은 큰 성과냈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too4u.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206010003389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12. 05. 17:33

IMF 외환위기 27주년 특별대담 <中>
기업구조조정도 시장원리 따라야 효과
현대로템 등 글로벌 일류회사로 우뚝
정부가 반시장적으로 간섭할수록 실패
반도체·자동차는 워크아웃·법정관리
19981022_제4차 정재계 간담회_김우중 이건희 정몽구
1998년 10월 22일 전경련 회관 대회의실에서 제4차 정재계 간담회에서 7대업종 구조조정 작업의 성과를 점검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오른쪽부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전경련 회장 겸 대우그룹 회장, 이규성 재경부 장관, 박태영 산자부장관. /제공=전경련

[대담=김이석 논설심의실장·황남준 대기자]


-국민의정부는 출범 전부터 '3각 빅딜'을 일방적으로 추진 하다가 여의치 않자 1998년 7월 4일 재계와 합의를 거쳐 8월부터 5대그룹의 7개 업종(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항공산업, 정유, 철도차량, 발전설비 및 선박엔진)에 대해서 자율 구조조정을 추진했습니다. 전경련 중심으로 실행된 5대 그룹 7개 업종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은 성과가 어땠는지요.


가장 규모가 컸던 반도체와 자동차의 경우 정부가 기업의 '자율'에 맡겨 놓겠다고 약속했지만 추진과정에서 그 약속을 어기고 성급하게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합병을 밀어붙였어요.

정부가 밀어붙인 반도체와 자동차 빅딜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항공기, 철도차량, 정유, 발전설비 등 4개 업종은 전경련 주도로 머리를 맞대고 구조조정을 추진한 결과 잘 진행됐어요. 석유화학도 만약 정부가 전경련 방안을 따랐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때 전경련 주도로 사업교환에 성공한 현대로템 (전동차), 두산에너빌리티 (발전설비), 한화엔진 (선박엔진), 한국항공우주 (항공산업) 등은 현재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회사로 재탄생해서 지금 우리 제조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반도체의 경우 제가 직접 나서서 사업교환 조정 작업을 벌여 지주회사 체제로 가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되 R&D나 신규 투자를 할 때에는 협력하는 쪽으로 의견이 접근됐습니다. 그런데 경영주체를 꼭 정하라는 강봉균 수석의 압박 때문에 일이 틀어졌어요. 책임경영 주체가 현대전자로 결정되자 LG그룹이 강하게 반발했어요. 현대전자가 부채를 안고 현금으로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지만 1년 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이듬해 워크아웃을 당하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요.

자동차의 경우 1998년 12월 7일 삼성, 대우그룹간 자동차 빅딜을 추진한다고 공식 발표됐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진척이 없자 김 대통령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독대한 후 6개월 넘게 진통을 겪다가 무산됐어요. 기업 가치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른데 쉽게 타협이 될 리가 없었지요. 당시 경제 관료들은 지원은 안 해주면서, 가격 협상도 되지 않았는데 무조건 인수부터 하라는 '선(先)인수 후(後)정산'을 강행했습니다. 이 때문에 협상이 깨졌다고 김우중 회장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재계가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는데 정부가 시기를 앞당기라든지, 경영주체를 정하라든지 간섭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빅딜'은 말 그대로 주고받는 거잖아요. 기업은 인력과 기술과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가치에 대해 거래상대방들의 평가가 서로 이득을 보는 가격을 찾을 때 사업교환도 성사됩니다. 간섭을 심하게 하다 보니 결국 실패한 것이죠.

-1999년 1월 반도체 빅딜이 잘 안 되니까 결국은 김대중 대통령이 구본무 LG 회장님을 불러서 LG 반도체를 현대에 넘겼으면 좋겠다고 중재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때가 1월 6일로 기억됩니다. 그 며칠 전 12월 23일 미국경영컨설팅회사인 ADL사의 경영 평가가 끝나서 운영주체가 현대로 결정됐는데 LG가 굉장히 반발했어요. 마지막에는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서 LG 구본무 회장을 부른 후 LG반도체 지분을 현대전자에 모두 넘기는 것으로 마무리됐어요. 그러나 그 후 가격협상이 잘 되지 않자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아예 가격을 2조5600억원으로 정했다고 해요. 누가 누구를 합병할지와 가격까지 정부가 정해준 셈이지요.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판정이 나야지 인위적으로 정부가 이걸 갖다 붙여라 저걸 빼라고 했는데, 그런 반시장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것은 실패로 끝이 나게 마련입니다.

-삼성자동차 빅딜이 7개월간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결렬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삼성자동차 빅딜에 심혈을 기울였고 김우중 회장도 마지막 순간까지 성사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강봉균 경제수석과 이헌재 위원장 등 경제 관료들의 의도적인 방해가 있었다고 김우중 회장이 얘기했는데요.

자동차 빅딜에 대해 저는 답할 게 없어요. 내가 삼성을 떠난 지 오래 됐는데도 김 회장은 "손 부회장은 빠지라"고 했어요. 김우중 회장은 그때 GM과 합작 형태로 50% 지분을 팔아 80억 달러를 갖고 올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게 잘 성사되도록 정부가 김우중 회장을 도왔어야지요. 관료들이 다른 것은 지원을 하면서 왜 대우차의 GM매각은 성사되도록 지원하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그랬으면 대우차를 거의 공짜로 GM에 넘겨주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제값을 받았더라면 대우차가 지금 현대차나 기아차처럼 컸을 겁니다. 당시 대우자동차에는 개발된 신차가 많았어요. GM이 도저히 상상도 못한 거예요. 대우자동차 같은 캐시 카우(cash cow)를 미국에 팔아넘긴 건 안타까운 일이죠. 



-당시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을 거쳐 해체된 것은 우리경제 초유의 불행한 사태였습니다. 대우그룹이 유동성 지원 요청을 하고(1999년 7월 19일) 실제 워크아웃이 실행될 때(11월 4일)까지, 불과 100일 정도로 해체과정이 너무나 신속했습니다. 대우그룹 해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파산이었는데 대우그룹 해체를 가져온 정부의 워크아웃 결정, 과연 적절했다고 보시는지요.

미국 자동차의 간판기업인 GM이 어려울 때 미국 정부가 지원했습니다. 우리나라 간판기업인 대우자동차는 정부가 지원했더라면, 외환위기를 극복하느라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배나 되는 168조원의 공적자금을 쓰지 않아도 됐다고 봅니다.

그때 유동성 문제를 풀어줬더라면 기업도 살고 실업자도 많이 안 나왔을 텐데. 많은 돈을 들이고,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데 거기에 대해 따끔한 평가가 없었습니다. 그래놓고 기업구조조정이 성공했다고 떠들기나 하고.

-강봉균 경제수석은 'IMF 외환위기 극복하는 데 정부의 기업구조조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외환위기 극복을 크게 앞당겼다'고 주장했습니다. IMF 초기부터 5년 간 우리 경제를 되돌아볼 때 정부의 일관성 없고 일방적인 기업구조조정 정책이 오히려 외환위기 극복을 늦췄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정부의 구조조정정책이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공로자라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성공한 게 아니었어요. 정부가 시장 기능에 맡겼으면 훨씬 더 빨리 극복하고 우리 경제에 주는 충격도 덜했을 겁니다. 만약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지 않고, 그 여파로 현대그룹도 부실이 깊어지지 않았다면, 경제가 갑자기 나빠질 수 없죠. 정상적으로 기업과 경제가 움직여가면 경제성장율이 2001년 3%대로 내려앉을 수는 없어요.

1998년 마이너스 6.7% 경제성장은 구조조정 한다고 기업에 손대고 칼을 대고 수술한 후유증이 드러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출을 늘리자는 김우중 식 처방을 따랐더라면 큰 부작용 없이 제2의 경제위기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대우그룹도, 현대그룹도 안 무너지면서 경제를 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기가 진정되니까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환이 들어오고 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메스를 가해서 대우와 현대를 죽였는데 그건 순전히 정책 실패라고 봐야지요. 그것은 경제의 정상적인 운영에 따른 저성장이 아니고 구조조정이란 잘못된 정책의 실패로 우리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우그룹에 대한 정부의 신속하고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구조조정 정책에 무리수가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은 것은 대우의 부실이 전이된 측면과 햇볕정책으로 대북 투자 사업에 돈을 쏟아부어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만.

두 가지가 겹쳤다고 볼 수 있어요. '잘못된' 구조조정으로 인해서 잘못된 외환위기 극복이 되고 제2의 경제위기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 경제에 혹독한 악영향을 미쳤어요.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이 2000년5월 유동성 위기에 처합니다. 2001년 3월 채권단이 현대건설에 출자전환을 결정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됩니다. 현대건설이 워크아웃 되니까, 반도체값 하락으로 경영난이 겹쳤던 현대전자까지 워크아웃으로 가게 되고, 이것이 현대그룹 해체로 이어집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십니까.

부실 투성이인 국민투신 및 한남투신, 한화정유,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해서 빚을 과도하게 불렸어요. 영업손실도 많이 나고. 거기에 대북사업까지 겹쳐 위기가 발생했다고 봅니다.

(당시 기업구조조정 작업을 중재한 이병욱 전경련 기업경영팀장도 이에 대해 "경상수지 흑자를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기업부채나 구조조정 문제는 기업들이 간절히 바랐던 '기업구조조정 특별법'을 통해 여건을 만들어줬으면 5대 그룹뿐만이 아니라 전체 기업들이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정부가 그걸 허용하지 않고 부채비율을 줄이는 정책을 강요하다 보니 결국 기업을 망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현대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대북사업 추진이 현대그룹의 경영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현대의 대북사업은 정부의 직간접적인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북한의 체제 리스크를 감안할 때 위험이 컸습니다. 당시 재계는 어떻게 바라봤는지요? 대북사업을 추진하면서 현대건설 등 현대그룹 주력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는데 우려하는 분위기는 없었나요.

현대의 대북사업은 겉으론 대북 경제협력, 금강산 관광사업이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기업이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현대가 너무 정치와 연루돼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우려했죠. 뭐든 과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현대가 큰 기업이긴 하지만, 대북투자는 투입에 비해 결과가 나올 수 없거든요. 그런 투자를 하면 유동성 위기가 생길 수밖에 없죠. 기업은 되도록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일정한 거리를 둬야합니다.

◇대우·현대의 해체, 2001년 제2 경제위기 자초했다

기업구조조정이 잘못돼서 경제위기를 부르고 결국 위환위기 극복이 더욱 늦춰졌다는 점은 거시경제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99년 초부터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은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1998년에는 마이너스 6.7%에서 1999년에는 1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9년 하반기 정부가 대우그룹 워크아웃을 결정하자 투신사 '펀드런'이 발생하고 증시가 폭락했다. 연말까지 다섯 번의 금융안정대책으로 간신히 진정됐다. 한동안 내려갔던 금리가 10%대로 치솟고 부도사태와 기업 경영난이 심했다. 이를 계기로 잠재돼 있던 현대그룹의 부실과 경영난이 밖으로 나타나고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금융, 실물 경제로 확대돼 제2의 경제 위기로까지 번졌다. 현대그룹과 정부의 무리한 대북투자 사업도 한 몫 한다. 그 결과 2001년 경제성장률은 3%대로 주저앉았다.

그 촉매가 대우 회사채를 펀드에 대거 편입했던 현대투신의 부도 위기였다. 자본잠식에 빠졌던 부채 투성이의 현대투신, 현대건설, 현대전자 등이 잇따라 유동성 위기에 빠진다. 그동안 무리한 기업 인수와 대북사업에서 비롯된 현대그룹 경영 위기는 마침내 2001년 봄부터 국내 최대 그룹인 현대그룹의 해체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이전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11월 IMF 외환위기의 극복을 공식 선언한다. 그러나 제2차 경제 위기로 이 선언은 구두선에 그친다. 실제 IMF를 졸업한 것은 IMF에서 빌린 돈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한 2001년 8월 23일이었다. 만약 대우그룹을 워크아웃에 집어넣지 않고, 대우사태와 대북사업으로 현대그룹의 경영난이 악화되지 않았더라면, 2000년 초에는 IMF에서 빌린 자금을 모두 갚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