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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소위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t)은 반민주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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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2. 06. 18:20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최악의 정부도 무정부보다는 낫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의 말이다. 이는 "만일 우리가 천사라면 정부가 필요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들에겐 언제나 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말하는 인간도 좋은 정부에 의해서 통치를 잘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간들은 통치를 잘 받기 전에 국가가 우선 통치되길 원한다. 그들은 좋고 나쁜 정책들 사이에서 선택하기 전에 그들은 우선 선택할 어떤 정책을 원한다. 그들은 국가라는 배가 취항하는 항로와는 관계없이 그들은 강력한 선장이 있음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1917년 두 번의 러시아 혁명과 1920~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의 파시스트 혁명을 거쳐 1940년대 중국의 공산혁명에 이르는 근대의 거대한 혁명들은 그들의 국가가 나쁘게 통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충분히 통치되지 않는 것에 대해 실망한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 혁명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유지하고, 그리고 어쩌면 나쁘게 그러나 확고하게 권력을 사용하는 혁명지도자들의 결의와 능력의 덕택으로 성공했다. 현대의 대중들은 어떤 특수한 정책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거대한 통치 실패에서 반영되는 정부의 유약함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이런 불행한 위기에 직면한 국가는 분명히 강력한 통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더 필요한 것은 국민의 잠재적인 에너지를 하나의 국가의 목적에 동원하는 사명감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환언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과거와 그리고 미래의 진심 어린 수호자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지성적 전통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빗나간 자유민주주의의 궤도 이탈을 인식하고 올바른 지성적 궤도에 재진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대통령과 정부는 필요한 정책을 위한 국민적 지지를 동원해야 한다. 오늘날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텔레비전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기의 비전과 정책을 설득하고 선전할 수 있는 참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정치적 설득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이나 팜플렛을 통해 지도자들이 자신의 비전과 정책을 가능한 한 널리 유포시키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1930년대 들어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리고 1940년대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 같은 통치자들은 여론의 지지를 동원하는 데 라디오 방송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텔레비전이 제한된 보급률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에 거의 전 국민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좀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텔레비전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안에서 정치과정이 발생하는 객관적이고 복잡한 질서를 가정한다. 다수도 그 질서를 쉽게 전복할 수 없다. 그 질서의 원칙들은 자유민주주의의 형성에 기여한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를 출발점으로 1689년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미국의 독립선언서', '미국 헌법의 첫 수정법안',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같은 문서들에 성문화되어 있다. 오늘날 악의 뿌리는 주로 빗나간 정치철학이나 철학 그 자체의 부재에 있다. 따라서 병든 자유민주주의의 구제는 오늘의 혼란한 정치철학을 바로 세울 건전한 정치철학의 부활에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적 정치철학은 자연법이 정치의 객관적인 기준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거의 언제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며 지배적으로 현상유지의 이데올로기였다.
모든 정치철학은 그 시대의 불타는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어 그 결과 모든 시대가 공유하는 진리의 관점에서 어제의 정치적 경험에 대한 하나의 반성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정치철학의 과제는 우리 시대의 정치적 문제들을 이해하고 또 해결하기 위한 이중적 목적을 위해 항구적 진리들과 객관적 기준을 정치세계에 적용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의 딜레마는 그것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알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이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딜레마이다. 정치철학이 없는 정치적 행동은 맹목적이다. 설사 철학이 있다 해도 그것은 근시안적인 것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철학의 일반적인 명제들과 정치적 행동의 구체적인 조치 사이의 격차는 이상주의적 합리주의의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경험의 시행착오에 의해서 메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입법부의 일부 시대착오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맹목적 대중영합주의, 그리고 편파적 언론과 각종 극단적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같은 신-봉건주의적 계급들의 무한 투쟁은 정부의 건전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의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다. 우리는 시급히 과잉 민주주의의 만성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필요한 정치철학적 성찰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정치지도자들은 그런 성찰을 반영하는 행동으로 옮길 용기와 결의, 그리고 전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고대 로마공화정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헌법적 독재자(a constitutional dictator)"를 임명했다. 그리고 그 독재자는 가장 빠른 기간 내에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고 그 비상대권을 원로원에 반납했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본보기였다. 역사적으로 미국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리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 등이 제왕적 대통령으로 불렸다. 민주국가에서 가장 뚜렷한 제왕적 대통령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이었다. 그는 약 30차례의 암살기도에서 살아남아 오늘날 마침내 나폴레옹 황제를 넘어서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근래에 정당들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면 일시적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엄밀한 의미에서 비상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만큼 성공을 거둔 경우가 별로 없어 보인다. 정당이 그 자체의 운영조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구성원들의 집단적 책임회피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부는 그런 집단적 책임회피가 용인될 수 없다. 정부는 전쟁이나 국내적 반란에 직면했을 때 계엄령의 선포와 같은 헌법상 비상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 국가 위기가 아닌 상태의 정치적 무기력과 같은 질병의 경우에는 그 질병의 치유를 위해 차라리 제왕적 대통령의 역할이 요구된다. 제왕적 대통령은 야당에 의해 즉시 독재자라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고 또 이론상으로 그가 전제적 독재자로 변모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정착된 민주국가이다. 따라서 소위 제왕적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라 삼권분립하에 자신의 임기 중 "대통령"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국가적 붕괴를 예방하기 위해서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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