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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학전 만든 김민기 삶은 ‘저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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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4. 07. 22. 17:33

김광석·설경구 등 스타들 키워내…아르코꿈밭극장, 유산으로 남아
[학전]김민기 대표 (2)
학전 김민기 대표. /학전
21일 세상을 떠난 김민기의 삶은 말 그대로 '저항의 역사'였다.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획일적인 수업 방식에 환멸을 느껴 붓을 놓고 가수의 길로 뛰어들었다.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포크송 듀오 '도비두'로 음악을 시작했다. 이듬해 명동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을 열며 '아침이슬'과 '가을편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작곡했다.

김민기의 음악 활동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누가 망쳤을까 아가의 꽃밭'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돼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았다. 카투사에서 군 복무 중이던 1975년 초에는 유신 반대 시위에 모인 군중이 '아침이슬' 등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영창살이를 마친 김민기는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됐다.

중등교사 자격증을 가졌지만, 김민기는 대학 졸업 후 봉제 공장과 탄광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다. 틈틈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지만, 박정희 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76년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당시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는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음악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김민기는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10.26 사건으로 맞은 '서울의 봄' 시기에 음악활동을 재개했지만,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잡자 다시 낙향했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관제 예술제인 '국풍81'에 참여하도록 회유했지만, 농사일을 핑계로 끝까지 거절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1983년 화재로 집이 전소돼 서울로 올라온 김민기는 이듬해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의 방해로 음반은 거의 팔리지 못했고, 1987년 6월항쟁으로 금지곡들이 해제될 때까지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90년 한겨레신문의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 참여해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한 뒤 전국 순회공연을 하면서 20년 만에 '아침이슬'을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불렀다.
1991년 김민기는 20년 넘게 달려온 가수의 길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연극 연출가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같은 해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고 '지하철 1호선'을 공연했다. 뚝심으로 대학로를 지킨 그의 손을 거쳐 수많은 예술인이 스타로 성장했다. 들국화, 유재하, 강산에, 동물원, 안치환 등 통기타 가수들은 학전에서 라이브 콘서트 문화를 이끌어갔다. 특히 고(故) 김광석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매년 학전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충무로의 걸출한 배우들도 학전을 통해 성장했다. 설경구와 황정민, 조승우가 바로 학전을 대표하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출신이다. '영원한 청년'으로 우리 곁에 남을 줄 알았던 김민기의 열정도 세월 앞에 무뎌졌다. 김민기는 지난해 11월 만성적인 재정난과 건강 문제까지 겹치면서 학전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 지난 3월 문을 닫은 학전은 폐관 4개월 만인 이달 17일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아르코꿈밭극장은 평소 어린이극에 관심이 많았던 김민기가 남겨놓은 마지막 유산이다.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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