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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칼럼] 일송 김동삼 선생의 통합·공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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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3. 12. 2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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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국내 대학교수들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라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선정했다. (10일 교수신문)

지금 우리 사회는 견리망의의 현상이 난무해 나라 전체가 마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싸움판으로 변질했으며, 정치인들은 국리민복(國利民福)보다 파당적 이익에 매몰되어 있다는 진단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일 서울 서대문역사공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열린 '이 시대의 통합을 추구하기 위한 질문과 성찰'이란 이름의 일송 김동삼 선생 추모학술대회는 많은 시사점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의 행적과 인품, 정신 등 진면목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제대로 배우고 깨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선생은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며 남만주를 아우르는 최고통수권자로, 무장항일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회자된다.

일송 김동삼 선생을 한 줄 요약하면 '권위·공의(公議·공평한 의론, 公義·공정한 도의)·열정을 갖춘 지공무사(至公無私), 통합의 지도자'이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김동삼 선생이 1937년 4월 13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뒤 미주지역에서 한인 교민들이 발행하던 '신한민보'는 같은 해 6월 17일자에 '김동삼 선생의 서세(逝世)'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냈다. 필명 동해수부(홍언·洪焉)는 이 기사에서 김동삼 선생을 '중국 한국 혁명당 중에 제일류 인물'로 '연합정신을 가진 통합지향의 지도자'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혁신유림인 일송은 20대인 1907년 향리인 경북 안동 내앞(川前) 마을에 3년제 신식 중등 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우고 가르치는 데 앞장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망국으로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친인척을 인솔하고 삭막한 만주 땅으로 망명, 백서농장 개척과 무장투쟁 등 총체적인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같은 군사조직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일송 김동삼은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자였다. 당시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나뉘었던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 민족통합을 우선으로 두고, 좌우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념에 유연하고 개방적이었다.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4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던 1923년 상해 국민대표대회'에서 일송 선생은 의장으로 선출됐다. 부의장은 민족주의 계열의 안창호와 사회주의 계열의 윤해였다.

일송 선생은 1922년 8월,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남만주의 중요한 독립운동 단체 '8단 9회 대표'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열고 대한통의부를 결성했을 때도 대표로 뽑혔다.

그러나 선생은 민족통합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았다.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삼부로 나뉘자 선생은 삼부통합운동을 펼쳤다. 최대 세력이었던 정의부 출신이지만 통합을 위해 정의부를 탈퇴하고, 신민부의 김좌진, 참의부의 김승학 등과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결성한 것.

또한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결집하는 민족유일당을 만들기 위해 만주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민족유일당재판책진회'를 조직했을 때도 중앙집행위원장은 선생이었다.

일송 선생이 민족통합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자신을 버린 결과 독립운동가들이 한결같이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었다. 선생은 민족통합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김좌진 등의 신민부와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한 한족총연합회 회장에 이름을 올렸다. 부회장은 김좌진이었다.

실로 한국 독립운동사상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지도자로 선출하고, 또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모두 아우른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일송 선생이라는 학계의 평가다.

자리를 탐하지 않았던 선생이 늘 지도자였던 이유는 초지일관 민족통합과 항일무장투쟁을 주창했던 노선의 일관성에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임명되고서도 항일무장투쟁의 터전을 버려둘 수 없다고 고사했던 이 '만주벌 호랑이'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공 직후에 항일 공작을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1937년 4월 13일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59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 연구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어떤 학자가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고 성과를 많이 낸 분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면 누구였겠느냐?"라는 질문을 좌중에게 던지자 이구동성으로 "김동삼"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독립운동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 보면 일송 김동삼의 독립운동이 가장 규모도 크고 성과가 혁혁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1937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기차게 만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흩어지는 독립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 세워 대규모 대일 전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념과 지역, 종교, 성별, 계층, 세대, 학력 등 분열과 갈등 증오의 양상이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극심하다. 초지일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 일송 김동삼 선생의 통합과 화해, 연대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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