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특별기고] 대한민국의 보안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군인-정치가의 리더십(II)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too4u.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221010010584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2. 21. 18:07

20240207010004005_1707299782_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오버로드 작전(Opetation Overlord)이 고도로 위험한 모험이 될 것임을 인식했다. 아이젠하워가 런던에서 그 작전을 맡을 때 독일의 롬멜은 연합국의 침공을 해변에서 패배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만일 해변을 잃게 되면 연합국들이 프랑스 전투를 이기고 그것과 함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롬멜의 판단은 옳았지만 그의 모든 장군들은 예외 없이 파스 드 칼라이스(Pas de Calais)가 선택될 것이라며 대부분의 예비 병력을 그곳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암호의 해독에 의해 가용하게 된 최고위급 독일육군 신호들의 해독을 통해 이런 사실은 아이젠하워에게 잘 알려졌다.

그리하여 그의 기만작전 계획의 목적은 침공이 북서부 프랑스의 아주 코너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는 독일 장군들의 견해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독일의 20개 사단을 엉뚱한 곳에 유지하고 전략적 예비 병력이 파스 드 칼라이스에 주둔하는 것을 의미했다. 패튼(Patton)장군의 지휘 하에 상상의 군대들의 증거가 칼라이스 바로 반대편에서 만들어졌다. 몽고메리 장군은 지브롤터에 파견된 것처럼 꾸몄으며 독일인들이 발견할 만한 곳에 가짜 계획을 가진 시체가 심어졌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실제 침공이 이루어지는 순간까지 노르망디 전투(the Battle of Normandy)를 감독하는 데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원래 5월로 계획되었지만 그러나 그와 몽고메리는 시실리와 이탈리아 작전에서 사용된 상륙선(船)들을 지중해에서 가져올 수 있도록 그것을 6월로 미루었다. 아이젠하워는 첫 공격력을 3개 사단에서 5개 사단으로 증강했다. 오버로드 작전은 전례가 없었다. 총 병력 수는 200만 이상이었으며 거의 7000척의 배들이 참가했다. 또한 1만1500대의 항공기들이 전개되었으며 그들 중 5000대 이상의 폭격기와 전투기-폭격기들이 5월 첫 주부터 코텐틴 반도(Cotentin Peninsula)에서 칼라이스까지 후방에 있는 모든 주요 도로, 철도, 터널과 교량을 파괴하기 위해 낮은 수준의 공습을 단행했다.

이것은 어떤 독일 예비 병력의 이동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공습을 고집했고 또 포격을 제공하고 첫 파도들이 들어갈 때 절대적 해군 우월성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거대한 해군력도 고집했다. 약 7만500명의 미국군과 8만3115명의 영국과 캐나다의 병력들이 이 첫 파도들을 구성할 것이다.
첫날에 아이젠하워는 5000척 이상의 군함을 사용했다.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최고위 사람들은 오버로드 작전에 대해 심히 비관적이었다. 처칠 수상은 엄청날 사상자들을 걱정했다. 마지막 가능한 순간에 아이젠하워는 오버로드 작전의 일자를 보다 나은 가시력(可視力)을 확보하기 위해서 6월 5일에서 6월 6일로 하루 연기했다. 그의 주된 걱정은 날씨였다. 이 결정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고 수정된 일자에 집착하는 것이 더욱 요구되었다. 실제로 6월 6일은 그 달의 전반기에 최고의 날씨가 되었다. 그는 그날이 신의 은총을 받은 그의 행운의 날이라고 불렀다. 디데이(D-Day) 그 자체는 모든 기대를 초과했다. 기습작전은 완벽했다. 오직 한 해변에서만 저항이 치열했다. 사상자들도 기대보다 훨씬 적었다.

둘째 날의 끝에 25만명의 연합국 병력과 많은 기갑장비들이 해안으로 올라왔다. 6월 11일 아침까지 모든 연합국 교두보들이 하나의 계속 이어지는 전선을 이루었으며 오버로드 작전의 첫 단계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아이젠하워는 보고할 수 있었다. 7월 20일에 그의 지휘소 가운데 한 곳에서 히틀러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것을 보다 독립적인 마음을 가진 독일 장군들이 전쟁은 명분을 잃었고 그래서 연합국들과 협상할 사람으로 히틀러를 대체하려고 결정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암살기도는 실패했고 히틀러는 반란 장군들을 일망타진하여 그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 노르망디 작전의 성공은 독일이 더 이상 서부에서 계속 이어지는 전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군이 8월 15일 프랑스의 리비에라(Riviera)에 상륙하고 10일 후에는 드골(De Gaulle)장군이 아이젠하워의 병력의 뒤를 따라 파리에 입성하여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1944년 12월에 아르데네(Ardennes)에서 독일의 반격은 독일인들이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조차도 아직도 무서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아이젠하워도 아르데네 공격에 놀랐다. 벌지 전투(the Battle of Bulge)에서 아이젠하워는 자기의 최선을 보여주었다. 처음으로 독일인 사상자가 연합군의 두 배 이상이었으며 그 전투의 종결 단계에서 전 부대들 중 많은 독일인들이 항복했다. 독일인들은 우측 뱅크에서 단호하게 라인강(the Rhine)을 방어하는 대신에 라인강 서쪽에서 싸우기로 결정함으로써 그들의 아르데네 실수를 합성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남아 있는 사단들 중 20개 사단이 괴멸되었다.

1945년 5월 7일 아이젠하워는 분쇄된 독일 당국자들에 의한 항복문서의 서명에 참가했다. 전쟁부를 대신하여 마샬 장군은 아이젠하워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다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 주재 미국대사를 통해 아이젠하워는 그의 "군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이고, 우호적이며, 친절하고, 그리고 솔직한 성격으로 인해 아주 위대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1946년 아이젠하워는 옛 마샬 장군의 직책이었던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이 의무들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3년간 임기를 마친 뒤에 뉴욕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저명한 교수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가 다른 환경에서 결코 가질 수 없는 많은 훌륭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1950년 10월 트루먼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에게 새로 창설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최고사령관직을 수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1951년 1월에 컬럼비아대학교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주로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그는 이데올로그(ideologue)가 아니었다. 그는 나치 독일을 증오했지만 러시아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이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지 않았던 것처럼 칼 마르크스를 전혀 읽은 적이 없었다.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시절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의 교수 임명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런 교수는 강의와 세미나에서 낯설고 진실이 아닌 것들을 소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교수들이 그들의 교육에서 비밀스러운 어젠다(agenda)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는 NATO 지상병력에 대해 아주 실질적인 역할의 견해를 그것들은 러시아의 어떤 침공도 늦추고 또 양측에 발생한 일에 대한 그 함의를 고려할 시간을 주기 위해 충분히 강력해야 했다. 그는 미국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소련도 핵무기의 시대에 일부러 제3차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양측이 실수할 위험은 진정으로 존재했다. NATO는 그런 실수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했다. 이런 이유에서 NATO는 진지하게 간주할 효율적인 사령부 구조와 충분한 전투부대가 필요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NATO의 대의를 제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1951년 1월 1일 미 의회 합동연설에서 그는 "문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첫 전선은 독일의 엘베 강(the Elbe)에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유럽에서 소비하는 1달러가 미국 내에서 소비하는 4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설이 있은 후에 미국이 NATO를 지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에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1951년 7월 3일에는 런던의 그로스비너 하우스(Grosvener House)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연합의 모임(the English-Speaking Union)'에서 행한 그의 연설도 동일한 효과를 거두었다. 1200명에 달하는 영국의 주요 인사들로 구성된 관중들도 그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윈스턴 처칠은 그 연설을 자기 생애에 미국인이 행한 가장 위대한 연설 중 하나라고 불렀다. 옳은 기회에, 옳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이 아주 알맞게 부각된 연설이었다. 그는 칭송할 만한 연설가가 되었다. 이제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미국에는 성공적 장군들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전통이 있다. 그 전통은 제1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제7대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그리고 제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들 중 한 사람인 드와이드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이 미국 대통령에 출마할 기회는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성향의 장군들을 싫어했다. 그는 언제나 앞에 나서길 싫어했다. 그는 한 때 "나는 가능한 한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같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 나서기보다는 발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조명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조명이 자기에게 오길 기다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의무가 명백하게 부르면 결코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든 그는 엄격히 의무감에서만 대통령직을 수락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1780년대에 정확히 조지 워싱턴 대통령직에 접근했던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자기를 워싱턴과 결코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견되는 것을 좋아했다.

1950~1951년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우익을 반대하고 그리고 또 한 번의 민주당 승리에 심각한 반대를 제공하라는 점증하는 압력을 받았다. 그는 균형예산 외에는 국내 정책에 대한 체감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있는 고립주의를 혐오했다.

당시 로버트 태프트(Robert A. Taft)가 정책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을 대변했다. 태프트에 대한 그의 혐오가 그의 이름이 1952년 3월 뉴햄프셔에서 열린 예선에서 공화당 경쟁자들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도록 동의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런 선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 때 여전히 유럽에 있었다. 그는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프트가 받은 3만5838표를 넘어 4만6661표로 승리하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전환점이었다. 선거자금이 아이젠하워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계속)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