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특별기고] 국부 이승만 박사의 스승 우드로 윌슨: ‘철인-대통령’의 리더십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too4u.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20010011619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20. 18:13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202403060100048430002805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청년 이승만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얼마 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한 당시 우드로 윌슨 교수는 이승만을 주변에 "한국 독립의 희망"이라고 소개했다(David Halberstam,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New York: Hyperion, 2007). 그 후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을 받아들여 철저한 윌슨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윌슨 대통령의 청출어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100년 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였을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종말에도 말씀이 있었다. 아름다운 말, 희망을 부풀게 하는 말, 민족을 감동시키고 또 인류를 매혹시키는 말이 있었다. 놀랄 만한 순간에 군대보다도 더 강력한 말이 있었다. 가장 처참한 희생을 영광스러운 투쟁으로 보이게 만드는 말이 있었고 또 5대양 6대주에 떨치고 수십 년에 걸쳐 메아리치는 말이 있었다. 191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제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그런 굉장한 말의 지도자였다. 그의 행동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정치적 목적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으며 무서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유산은 바로 그의 말이었다. 비록 그의 발걸음이 여정의 끝에서 비틀거리고 종국에는 쓰러졌지만 그의 말은 계속 살아서 후세들로 하여금 그가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꾸준히 추진하도록 만들었다. 윌슨은 학자-정치가, 고전적으로 표현한다면 철인-정치가로서 대표적인 "말의 지도자"였다. 그의 말은 영구적 세계평화수립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표현방식을 차용한다면 윌슨은 "평화의 신(神)"이었다. 그는 살아 숨 쉬는 20세기의 예언자였다.

1919년 1월 4일 윌슨 대통령을 태운 여객선 조지 워싱턴호가 파리를 향해 뉴욕 항에서 출항하여 맨해튼을 지날 때 고층건물에서 수만 명의 환송객들이 손수건을 흔들고 색종이를 뿌렸다. 배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자 거대한 비행선이 흔들거렸으며 비행대가 공중제비를 했다. 그 너머에는 11척의 전함이 대통령이 승선한 배를 목적지까지 호위할 준비를 했다. 유럽에서 환영은 훨씬 더 열광적이었다. 9일 후 조지 워싱턴호가 프랑스의 브르타뉴 해안에 모습을 보이자 브레스트시의 전 주민들의 함성과 "인간권리의 챔피언 만세" 그리고 "국제사회의 창시자에게 영광을"이란 슬로건을 내건 현수막들은 오직 서막에 불과했다. 프랑스 역사상 파리에서 윌슨 대통령을 기다리는 그런 대규모의 군중 모임은 없었다. 약 200만명의 파리 시민들이 미국의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퍼레이드의 일정에 따라 건물 창가의 좌석은 300프랑에 팔렸으며 청소년과 어린이들은 "정의의 화신 윌슨"을 한번 보기 위해 가로수에 올랐다. 윌슨 대통령과 레이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e) 프랑스 대통령을 태운 첫 번째 마차와 함께 8마리의 말들이 끄는 마차들이 길을 따라 지나갈 때 3만6000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질서유지를 위해 군중들을 막아섰다. 멀리서 환영의 포성이 울렸고 제비꽃 꽃다발들이 윌슨 대통령의 부인이 탄 마차에 비 오듯이 쏟아져 거의 마차가 묻혀버릴 정도였다. 함성은 귀를 먹게 했으며 심지어 두려울 정도였다. 윌슨은 함성 속에서 자신을 초인(superman)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한 장관은 다음 주에 윌슨 대통령이 영국의 런던과 칼리슬과 맨체스터를 방문했을 때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새해 1월 초에는 고대의 전통에 따라 금빛 모래가 뿌려지고 "평화의 신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린 이탈리아의 로마에 들어선 후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도 그보다 더 장엄한 승리감을 결코 맛보지 못했다고들 했다. 밀라노에서는 그에 대한 열렬한 환영이 히스테리에 가까웠으며 윌슨 자신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글썽였다. 거대한 군중이 거리를 가득 채웠고 '인류의 구원자'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온 모세"라고 윌슨을 환영하는 전단들이 그가 탄 자동차에 홍수처럼 쇄도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윌슨을 그렇게 특별하게 기리는 것이 동맹국 수상들에겐 악몽이었다. 그것들은 대중들의 정치적 의견의 분명한 표현이었다. 사실상 유럽의 인민들은 윌슨에 대한 신임을 과시했다. 그것은 윌슨에게 평화회의가 소집되기 전에 국제연맹을 위해 윌슨이 계속적인 분위기를 띄워나갈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기회들을 가져다주었다. 윌슨은 영국에서 시작하여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그리고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강력하게 규탄해 갔다. 그는 구질서의 중심에 힘의 균형이 있으며 이 균형은 검으로, 즉 경쟁적 이익의 불안한 균형이 결정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메시아 같은 사고와 발언이 유럽의 지도자들에게는 결코 반가울 리가 없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Clemenceau) 수상이 한번은 윌슨에게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말하는 것 같다고 빈정거렸으며, 영국의 조지(George) 수상은 윌슨이 때론 예수와 나폴레옹 사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윌슨은 미국 남부의 엄격한 장로교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정과 종교 그리고 남북전쟁 시기의 남부의 환경적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어린 시절 남북전쟁 전투지역 가까이에 살면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인간의 희생을 알게 되었다. 전쟁과 종전 후 재건의 경험은 남북을 동시에 잘 이해한 〈분열과 재통일〉(Division and Reunion, 1829~1889)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된 생각들의 토대가 되었다. 유혈과 전쟁에 대한 윌슨의 혐오가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년 시절의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에 그 시대를 생각할 때 공평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의 굳은 신앙심은 세상이 정당한 신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불의에 대한 투쟁과 인간 열정에 대한 투쟁이 신에 대한 책임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고 또 사랑이 이끄는 힘이 최고의 힘이며 가장 숭고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며 진실한 인생관은 인간의 경험에서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것이라 믿었다. 그에겐 인간의 양심이 사람들의 의견보다도 더 상급 재판소이며 눈앞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가 중요했다. 물질적 성취는 지성적이고 정신적인 성취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신적인 것들이 당연히 본질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윌슨의 인생관에서 물질적인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것보다 더 중요한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윌슨 대통령의 참전 목적은 처음부터 미래의 전쟁을 방지할 국제적인 법질서제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17년 미국은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이 기초한 정당한 민족국가들 간의 평화 제도를 수립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전쟁에 돌입하여 150만명의 장병들을 유럽의 전쟁에 파병했다.

윌슨은 그 제도가 국가(state)와 민족(nation)간의 관계에 대한 미국적 개념을 반영하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전쟁을 방지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집단안전보장 제도라는 새로운 국가 간의 제도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은 바로 그런 미국적 아이디어의 제도적 구조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에 국제연맹의 수립이 미국의 주된 전쟁 목적이 되어버렸다. 윌슨은 유럽의 연합국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자치정부 권리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에게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전부 국가에 위임했기 때문에 국민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그 권력으로부터 주권을 회수하여 새로운 초주권적 국가제도의 수립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헌정질서의 학자 출신인 윌슨 대통령은 미국에게 국가 탄생과 행복을 준 원칙들이란 미국독립선언서의 원칙들이었다. 즉, 그것은 제한적 국가주권의 천명이었다.

미국의 전쟁 목적들은 1917년 초에 윌슨 대통령에 의해 사적으로 처음 구상된 그 유명한 14개 조항으로 집약되었으며 1918년 1월 8일 윌슨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서 공개적으로 처음 제시되었다. 국제연맹규약의 초안은 "헌법(Constitu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헌법은 미국인들이 자국의 연방정부차원에서 습관화된 법 제정과 집행의 과정을 초국가적 차원에서 단순히 복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계헌법을 위한 이 독특하게 미국적인 헌정질서를 이해하지 않는 한 평화회의에서 미국과 유럽 연합국가들 간의 심각한 차이를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평화회의에서 나온 조약의 비준이 미국의 상원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의 연설에 관하여 들은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은 14개 조항은 따분하다며 딱 10개면 좋았을 것이라고 반응했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 수상은 선거운동 중이었는데 그는 그때 독일인들로 하여금 전쟁의 모든 비용을 지불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전후타결에서 승전국과 패전국을 똑같이 공평하게 취급하는 원칙의 천명을 수락할 수 있겠는가? 독일의 반응도 적대적이었다. 독일은 14개 조항을 거부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결국 국제연맹을 원했다. 그들은 회원국들의 안전보장과 함께 결속되고 침략에 대항하는 보장으로 미국을 끌어들이는 그런 국제연맹을 요구했다. 그러나 문제는 피침 시에 미국의 개입을 약속하는 것이 유럽의 정부들에게는 그 조약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겠지만 그러나 그만큼 미국의 상원에게는 덜 매력적으로 만드는 딜레마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윌슨 대통령은 국가주권의 뿌리 깊은 구조를 개혁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야심적 계획을 망가뜨린 것은 바로 미국의 제한 주권 제도였다. 왜냐하면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막고 그리하여 미국의 국제연맹 참여를 좌절시킨 것은 그 조약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미국의 상원이었기 때문이다.

약 1세기 전의 빈 회의에서처럼 파리에서도 모든 중요한 결정은 승전 강대국들에 의해 내려졌다. 그러나 그때와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국가의 성격이 변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국민국가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점점 많은 정부들이 빈체제가 토대를 두었던 국가 상호 간의 유대를 자신들의 국내적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포기했다. 당시 윌슨의 비전은 자유주의 이념을 대변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자신의 평화계획을 모두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윌슨의 지속적 영향은 그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대통령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한다. 국제정치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다 같이 그것이 칭송이거나 혹은 모욕적으로 종종 난폭하게 의견을 달리하지만 외교정책 분야에서 여전히 공통적으로 '윌슨주의적(Wilsoni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정에서 원래 윌슨주의자였지만 그의 비극적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도 결국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해 윌슨의 국제연맹을 보다 현실화한 유엔(the United Nations)을 창설했다. 그런 점에서 윌슨의 야망과 비극적 교훈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유산으로 귀신처럼 꾸준히 출몰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